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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0.01.11 waiting for the miracle 1

20100822

etc. 2010. 8. 22. 08:16


이곳에서 여행을 하기란 참 쉽다. - 적어도 내게는.
일단 카우치서핑 사이트에 가서 목적지로 검색 후 메일을 여남은 통 쓴다.
그러면 적어도 한두명은 긍정적 답을 주게 마련이다.
다음엔 미트파렌 사이트에 가서 출발일로 검색 후 문자나 전화를 몇 번 돌린다.
그러면 적어도 한명은 자리가 있다고 답하게 마련이다.
전날밤 가방에 대충 이것저것 챙겨넣는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끗

이곳에서의 나날이 이제 나흘밖에 남지 않았다.
내일부터 2박3일은 또 출타할 예정이니 사실상 하루밖에 안 남았다고 봐야겠다.
괜히 아쉬운 마음에 어제는 포츠담과 알트 쾨페닉까지 찍어주고
오늘은 빈터펠트플라츠 거리시장에 마지막 인사를 고하러 갔다. 다행히 어제부터 날씨도 끝내줬다.
포츠담은 왠지 고루할 거 같아서 여직 안 가고 있다가
그래도 베를린 6개월 체류하면서 상수시 한번 안 들르는 건 조금, 싶어서 걸음을 했는데
이런, 예상보다 좋네. 샬로텐부르크보다 훨씬 나은 듯.
녹지 사이로 건축물들이 적절하게 들어서 있어, 비싼 돈 내고 실내 구경하는 대신 산책만 해도 충분히 좋다.
나 역시 오랑제리 등은 건너뛰고 화랑만 둘러봤는데, 궁정 컬렉션이 흔히 그렇듯 대부분
하품나는 주제와 고루한 기법들이었지만,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도마>가 그 사이에 끼어 있어 깜짝.
17세기의 장엄추와 19세기의 부르주아스러움, 이렇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 샬로텐부르크 성과 달리
베르사유를 본따서 지어진 곳이다보니, 시각적 쾌감의 극치에 가까운 18세기 조각도 잔뜩 볼 수 있었다.
알트 쾨페닉은...전혀 베를린 같지 않았다! (칭찬이다)
만약 다시 이 도시에 체류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물과 가까운 지역에서 지내고 싶다.
변두리라도 상관없고. 힙한 예술가 지역 따위는 관심 없으니까.
 
이곳에 온 첫날 캐리어가 망가진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는데 (덕분에 한밤의 택시라는 사치를)
기막힌 타이밍에 중고 캐리어가 싼값으로 나온걸 보았다. 어쩌다보니 함부뤀에서 직거래를 다해보겠네.

귀국하면 읽고 싶은 책들이 밀려 있다. 위시리스트를 살피다가 문득 어느 책 제목에 피식했다.
대학 친구 중, 새내기 시절 우연히 도서관에서 만났을 때 내가 (해맑은 표정으로) 검색중이던 책 제목이
<식인의 역사>였기 때문에 사년 내내 그 첫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고 후일에 고백한 이가 있었다.
왠지 다음번에 그 친구를 만나게 되면, 이번에는 저 책을 지참하여 한결 참신한 인상을 주어야 할 것 같다.
- <능지처참>.

누가 말해줬는데, 뤼벡은 노르드제가 아니라 오스트제라고 한다.
아이고, 역시 후줌에 갔어야 했어.



메리 블랙의 목소리. 젊은 시절의 풀이파리 같은 청신함도 좋지만, 한숨이 결결이 배어나는 듯한 최근 목소리가 역시 더.




:

teufelsberg

etc. 2010. 7. 21. 07:40


와 사랑에 빠졌다.

내가 가진 베를린 안내서에 따르면:
베를린에서 가장 높은 해발 120미터(!)의 인공언덕. 전쟁의 잔해로 만들어졌다.

겸손한 높이를 자랑하다보니 정상에 올라가도 정상같지가 않은데-대체 정확히 어디가 정상이냐 싶은데,
연날리는 사람 일광욕하는 사람 사진찍는 사람 혼자 앉아 그림그리는 훈남 등 다양한 군상들이 있었지만,

진정한 매력은 다크사이드 오브 토이펠스베르크에.

철조망에 난 구멍으로 몸을 집어넣어 이래저래 길을 따라가다보면
분단시절 동독의 라디오 송수신을 교란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골프공 모양의 전파탑(?)과 그에 딸린
여러 건물들의 폐허가 된 잔해가 남아 있다.
한낮에도 손전등이 있어야 제대로 둘러볼 수 있을만큼 캄캄한, 때론 바닥이 반이상 무너진 공간들이
온갖 허접쓰레기와 마구 자란 식물들, 그리고 베를린의 다른곳과 마찬가지로 알록달록하게 사방을 도배한
그래피티 사이로 뻗어 있다.  
그야말로 황량하고, 살풍경하고, 버려진 장소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할 만하다.
타헬레스도 여기에 비하면 너무 팬시해 보이는.

이곳을 소개한 글에서는 '구급상자 지참을 권장'이라고 겁주었지만, 난 치마바람으로도 잘 돌아다녔다.
하지만 손전등은 확실히 아쉬웠고.


2002년 말뫼에서의 woven hand 공연 부틀렉을 다운받았다.
5월에 그리도 기대하던 공연을 막상 보고는 어쩐지 아쉬워 이젠 DEE도 전성기는 지난건가 생각이 들었고
(게다가 바로 다음날 프랑크푸르트에서 본, 바야흐로 절정기에 오른 조애너 뉴섬의 공연에 비교돼서 더욱)
그래서 한동안 이들의 음악은 봉인상태였지만 (겨울동안 지나치게 많이 듣긴 했다)
첫곡부터 바로 심장이 내려앉나 싶은 - 내게 익숙한 동요가 닥쳐왔고, 그래서 더욱 심정이 복잡해졌다.
2010년이 아니라 2002년 (적어도 2004년쯤에) 내가 이들 공연을 직접 볼수 있었으면 얼마나 감동했을까.

:

20100620

etc. 2010. 6. 20. 15:02

지난주는 한국 뺨치게 후텁지근했다.
이번주는 습도도 광도도 은근하니 적절했다.
다음주는 흐리고 축축할 예정이다.

슬슬 향수 증세가 나타나는 것 같다. 여름장마 후두둑 장대비조차 그립다.
제대로 낸 멸치 다시마 국물을 들이키고 싶다.

오늘 빈터펠트 플라츠 거리시장에서 사온 티라미수는 내 생애 최고라고 할 수 있었지만,
제대로 된 마스카포네는 순수 지방덩어리라더니
한국에서였다면 2조각은 족히 되었을 그 한조각을 다 먹고 나자 몇시간을 소화불량에 시달려서
어제에 이어 오늘도 뜨끈한 된장국을 들이켰다. 처음엔 좀 심심하게 만들어야 데울수록 감칠맛이 난다.
독일 온 후, 혼자 살다보니 양이 많아 남겨둔 음식이 맛이 갈랑말랑해도 아깝다고 먹어치우거나
생소한 음식이 속에 안 받았던 때가 적지 않은데, 그럴 때마다 된장국을 끓여먹으면 풀리는 느낌이었다.
-아, 하지만 소화불량을 감수하고라도 매주 사먹고 싶은 티라미수였다.
한국에서의 싸구려 크림치즈 티라미수와는 완전히 다른 부드러움. 질척할 정도로 들이부은 커피액.
시커멓게 아낌없이 뿌린 코코아가루. 거대한 쟁반에서 두부마냥 네모꼴로 푹푹 잘라낸 그 호쾌함이라니.

페어벨리너 플라츠 거리시장은 평일 점심대에 여는데다 딱 구청 앞이다. 그래선지 거진 식사류로 채워진다.
넥타이 부대들이 고즐렘, 팔라펠, 중국식 볶음국수, 블린, 쿠스쿠스, 브랏부어스트, 와플을 즐기고 있다.
매주 수요일 눈앞에 펼쳐지는 다국적 점심메뉴는 공무원들의 소소한 낙일지도.
나는 터키식재료 매대에서 말린 무화과를 사고(어학원 쉬는시간에 에너지 보충용 간식거리로 딱 좋다)
주로 채소와 치즈로 만든 다양한 페스토 혹은 크림(감자에 발라먹는다-독일에서 가장 저렴한 탄수화물은
빵도 쌀도 아니고 바로 감자다) 중 몇가지를 고른다.

요크슈트라세 거리시장은 거의 터키시장이라고 할 법하다. 상인도 고객도 과반수가 터키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여지껏 다른 시장에선 듣지 못했던 활발한 호객 소리가 들려온다.
-체리 1킬로에 2유로요! 2킬로는 3유로! -오이 4개에 1유로! 등등.
식사류는 거의 없고, 의류나 공산품도 조금은 있지만 식재료 특히 채소와 과일이 압도적.
대부분이 할인마트의 특가상품보다도 더 싸다.  
나는 터키인 할아버지에게 체리 1킬로를 산다. 서너번도 넘게 먹을 양이다.
요크슈트라세 s반 역에서 나오면 두갈래 길이 있는데, 오른쪽으로 꺾으면 이 거리시장이 있고
왼쪽으로 꺾으면 내가 베를린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묘지가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작은 야외카페가 있고, 비스듬히 경사진 부지 가운데로 가로수길이 뻗어 있으며,
무덤 사이로는 일반적인 콘크리트 통로 대신에 잔디가 그대로 깔려 있다. 그사이로 잔디를 밟고 지나가
커다란 마로니에 아래 나무벤치에 앉아 비닐봉지에 든 체리를 꺼내먹으며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수요일 오후는 독일에서 내가 보낸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로 남을 것이다.

브레슬라우어 플라츠 거리시장은 프리드나우 s반 역에서 가깝지만 초행길엔 좀 찾기가 힘들다.
시장 자체는 그저그렇지만, 바로 앞에 맛있는 이탈리안 아이스크림집이 있다. 나는 말라가를 제일 좋아한다.
럼에 절인 건포도가 잔뜩 박힌 아이스크림이다.
그리고 프리드나우 역은 내가 좋아하는 모든 요소를 다 갖추고 있다. 지평선과 평행을 이루는,
거리와 같은 눈높이의 플랫폼. 역전 야외카페에 앉은 사람들, 놀이터의 아이들이 시선을 맞출 만큼 가깝다.
조용하지만 적막하진 않은, 여유롭지만 돈냄새는 나지 않는, 적당히 낡았지만 퇴색하진 않은 집들이
그보다 더 높다란 나무들 사이로 햇빛 속에 고즈넉히 들어앉아 있다.

- 쓰고보니 이 네 곳 중 세 곳이 쉐네베르크다.
아무래도 내가 베를린에서 가장 그리워할 지역은 쉐네베르크가 될 것 같다.


:

20100615

etc. 2010. 6. 16. 05:25

초밥집 갔던 일요일 사진. (면상은 없음)
나랑 동갑인 스패니쉬 여자애가 찍어줌.
역시 그래픽디자이너의 감각이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물론 보스턴에는 가본적 없습니다 없고요.

:

20100610

etc. 2010. 6. 11. 06:28

독일 온 이후로 가장 더운 날인 듯하다 - 그래봤자 4달도 안 되지만.

자툰티켓을 샀다. 독일인들은 하여간 축구에 관해선 한국인 저리가라 하게 유치한 듯.
월드컵 기간 마트 특가상품들의 손발 오그라드는 이름들 하며.
덕분에 기차여행 저렴하게 할 수 있으니 저야 고맙죠. 독일팀 티셔츠도 유용히 쓰겠습니다. 잠옷으로...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방을 잘 고른 거 같다.
내 방은 3월까지 춥긴 했지만, 그 대신 이제 31도를 넘나드는 날씨에도 쾌적하다. 추우면 껴입을 수 있어도
덥다고 홀랑 벗고 있을 순 없자나. 건너편 집과의 거리가 10여미터 정도밖에 안되는 2층에서 말이다.
게다가 방에 라디에이터는 있어도, 에어컨이나 선풍기는 없다고.
얼마전까지는 방에 햇빛이 안 들어서 오후만 되면 나가고 싶어 안절부절이었는데(최소한 안뜰에라도)
이젠 방에서 나가기가 싫다.
티어가르텐에 가봤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리 좋지도 않았다.
윌머스도르프-젤렌도르프엔 더 푸르고 더 조용하고 더 그림같은 녹지가 널렸고
걸어다니기 힘들 정도로 쓸데없이 넓직하다는 건 결코 좋은 게 아님.

룸메는 7월까지만 이 집에 있을 예정이다. 나는 한달 더 지낼 것이고.
집주인이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들고, 룸메한테도 거슬리는 점이 많은데다, 월세도 싸다곤 할 수 없지만
위치 하나는 참 좋은 집이라. 룸메가 나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
그사이에 뮌헨에나 다녀올까. 혹은 함부르크도. 혹은 프랑크푸르트에 한번 더 갈 수 있을지도.


이런 날씨에는 기타연주곡이 최고. narciso yepes 들으며 멍때리기.


:

20100514

etc. 2010. 5. 14. 18:47

어제는 어학원 애들과 함께 한국음식점에 갔다.
갈비나 불고기는 없는, 분식집에 가까운 곳이었지만 분위기는 괜찮았다. (독일에선) 저렴한 편이고.
대부분 제육이나 쇠고기볶음을 먹었고 소주잔을 주문한 사람도 있었다. 반응도 괜찮았다.
하지만 닭볶음탕을 먹었던 이탈리아 여자애는 좀 고생했던 듯하다.
나로서는 닭볶음탕을 맵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부주의했던 것이다. 덜 맵게 해달라고 얘기할 것을.
생각보다 애들이 많이 와서, 주문할 때 도와주어야 한다고 잔뜩 긴장 타고 있었는데
뭐 식당 아주머니가 나보다 독일어 훨씬 잘해서...
그러고 나선 바에 갔다. 직원들 차림새나 내부 꾸밈새나 전형적인 캐주얼 맥주바였는데
메뉴는 온갖 커피와 카카오를 비롯하여 의외로 팬시해서, 홍대 카페에 그대로 갖다놔도 될 듯했다.
난 러시안티를 시켰는데 콘피추어와 설탕이 따로 나오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찻잔에 넣어져 나와서 살짝 실망.
물론 찻잔도 걍 맥주 마실때 쓰는 유리잔. 누가 멋없는 독일 아니랄까봐.

베를린 동물원은 입장료가 비싼 편이었지만 그값은 했다. 널찍하고 산뜻하고 냄새도 거의 없고
무엇보다 동물들이 깨끗하고 활발해 보여 좋았다. 서울대공원의 침울한 유인원들이 생각났다.

알트 나치오날 갤러리는 온통 대리석으로 내장된 방들이 참 멋졌지만 그림에 있어선 게멜데갤러리보다 못했다.
 
라이헬트에 처음으로 가봤는데 지금까지 본 독일 마트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품목 수준은 카이저와 비슷한데
훨씬 넓고 다채롭고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조금 걸어야 하긴 하지만, 앞으론 주로 여기서 장봐야겠다.

팔케의 스타킹들을 온라인으로 사보았다. 어차피 오프라인 매장에서도 착용해볼 순 없다고 해서.
온라인 세일상품 중에서만(그래도 꽤 여러가지 디자인이 있었다) 무조건 가장 작은 사이즈로 주문했는데,
만족한다. 무늬랑 색상 다양하고 촉감 좋고 짱짱하고. 세일가로 전부 한 켤레에 2만원대였고
게다가 해외배송은 안되니, 지금 질러주는 게 바른 선택.
(독일은 유럽치곤 배송이 무척 빨라서, 2-3일이면 온다. DHL의 원조 국가답다.)
사포 같은 발꿈치를 자랑하는 나는 평소에 스타킹보다 면 타이즈를 훨씬 선호하는데, 아쉽게도 세일상품 중
타이즈는 거의 다 애저녁에 품절. 누가 실용적인 독일 아니랄까봐.
하긴 베를린은 이건 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어중띤 상태니한동안은 이런 불투명 스타킹이 적절할 듯.
독일의 대표 브랜드 중 하나고 최초로 양말 왼발 오른발 구분을 했던 곳이라고도 하는데, 최근에는 월포드 등
외국 브랜드에게 밀리고 있는 느낌?

반팔옷이 거의 없는 상태라 살짝 걱정했는데
(하지만 1킬로당 14유로인 구제옷가게를 찾았으니 괜찮다. 단품을 사도 웃옷 3-6유로에 치마 7-9유로, 게다가
해피아워에는 30퍼센트 할인. 안에 털을 댄, 내 조막손에 놀랍게 들어맞는(!) 예쁜 가죽장갑을 9유로로 샀다)  
이 상태로 여름이 오면 반팔옷 따윈 필요도 없을듯.

화요일엔 베를린 최대라는 두스만 서점에 가서 루퍼스 웨인라이트 무료공연 보고, 책구경도 하고,
목요일엔 비텐베르크 플라츠의 파머스마켓?에 가보고.
주말엔 프랑크푸르트로 간다. 카우치서핑으로 숙박은 무료! 하지만 떡이라도 좀 사다 드릴까.
지금 보눙에서 걸어갈만한 거리에, 베를린의 유일한 한국 떡집이 있더라는.


       

:

내 누이의 작은 손

lyric 2010. 4. 30. 06:15


우리는 이 세상에 함께 나왔지
서로의 다리를 몸에 두른 채
내 뺨을 누이의 뺨에 맞댄 채
얽혀진 덩굴마냥 그렇게 났었네
 

우리는 강가에 살았었지
먹구름 떠도는 날이란 없던 곳
내 누이의 작은 손 안에서
햇살은 벌꿀처럼 흘러퍼졌네  
 

그러나 바스락거리는 수풀 속에서
시큼한 사과를 따던 날
들장미 덤불에 넘어진 누이는
그만 뱀에 물려버렸네
 

태양의 금빛 손가락 아래서는
모든 피조물이 그림자를 드리우지
하지만 흔들리는 수풀 너머로 해가 가라앉을 때
몇몇 그림자들은 그대로 머문다네
 

홀로 남은 나는 술을 마셨네
여러 병의 싸구려 위스키를
그러고는 뒷곁의 숲을 헤매었지
깎아낸 막대로 뱀들을 찔러죽이며
 

하지만 스산히 흔들리는 저 수풀 속에서
아직도 난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고
강을 따라 반짝이는 물결 속에는
아직도 누이의 작은 손이 아른거리네
 

그래서 나는 녹슨 가스통을
그리고 낡은 무쇠 삽을 꺼냈지
수풀을 불태워버리고
돌을 쌓아 강물을 막았네
 

태양의 금빛 손가락 아래서
모든 생명체는 그림자를 드리우지
하지만 흔들리는 수풀 너머로 해가 져갈 때
어떤 그림자들은 여전히 남아 있네



 

:

soft boys - tonight

lyric 2010. 4. 11. 17:44


얼핏 들으면 쫀득한 로큰롤 러브송 같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뭔가 쭈뼛



오늘밤 나는 여기 그리고 모든 곳에 있어
오늘밤 나는 여기 그리고 어디에나 있어
나는 여기에 그리고 모든 곳에 있을 거야
오늘밤

거대한 배가 남기고 간 물자국 속에
멋쟁이 여자애가 샐룩대는 엉덩이 곁에
멋쟁이 남자애의 입술이 그리는 곡선 위에 
오늘밤

비행기가 그리고 간 궤적 속에
연금도 없는 노인의 케이크 안에
하지만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여기 있는 건 아니야
오늘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가지 않는 곳에
나는 엄청나게 길쭉한 코를 들이밀 거야
오늘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오늘밤, 나는 나무들 아래 있을 거야
괜찮아
오늘밤을, 나는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어
오늘밤엔, 뭔가 잘못되지만 않는다면
다 괜찮을 거야
오늘밤은

네가 늙었을 때 주변을 돌아보면
뭔가 익숙한 소리가 들려올 거야
오늘밤 나는 떠나지만 여전히 머물러 있을 테니까

네가 현관에서 열쇠를 돌릴 때면
누군가 집 안에 있었단 걸 알게 될 거야
오늘밤 그건 나였지만 너는 영문을 모르겠지
오늘밤

망가진 차의 뒷좌석에
진공 보온병의 테두리 위에
어딜 가든 오늘밤 너는 나와 함께일 거야
오늘밤
네가 어딜 가든 나는 너와 함께할 거야
오늘밤
어딜 가든지 오늘밤 난 네 곁에 있을 거야

오늘밤, 난 네 곁에 있어
난 네 곁에 있어
오늘밤, 난 너와 함께 있어
난 너와 함께 있어
오늘밤, 난 네 곁에 있어
난 네 곁에 있어
오늘밤, 난 너와 같이 있어
난 너와 같이 있어

:

20100322

etc. 2010. 3. 23. 05:59


하이델베르거 플라츠에서 유독 아름답고 한적한, 뭔가 가슴이 아파올 정도인 하나우어 슈트라세를 따라가면
-나즈막한 나무 위의 오두막과 장난감같은 색색의 플라스틱 놀이터, 60년대쯤 지어졌을 3층보다 높지 않은 집들-
아이들 학교가 하나 나오고, 곧이어 쉐네베르크 묘지가 나온다. 여기엔 마를렌 디트리히가 잠들어 있다.
숙소에서 대로를 쭉 따라 1킬로미터로, 딱 산책하기 좋은 거리다.

그녀의 무덤은 구석에 있었고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마를렌'이라고만 적혀 있고 아예 성은 없다.
조그맣게 사진이 박혀 있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수도 있겠다. 관광지에 위치하지 않아서인지 꽃도 없다.
그 옆옆에 있는 헬무트 뉴튼의 무덤도 수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더 화려하게 장식되고 깨끗하게 손질되었으며 방문객의 흔적도 많은 것은 일반인들의 무덤이었다.

묘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제복을 입고 땅을 파거나 뭔가를 심는 직원 몇 외에는 노인들이었고,
그들도 대부분 손수레나 화분 등을 들고 와서 자신과 관련되었을 누군가의 무덤을 손질하는 중이었다.
가장 예쁘게 꾸며지고 사진이니 꽃이니 기념물이 빼곡한 것은 주로 어린아이들의 무덤이었다.
웃고 있는 어느 십대소년의 사진 옆에는 알록달록 색종이에 적힌 메시지들이 가득 걸려 있었다.

합정역 외국인묘지에 가본 사람이라면, 가장 인상적인 구역이 어린 나이에 경황없이 -때론 미처 이름도 없이-
죽은 목숨들의 초라하고 조그만 무덤이 모여 있는 곳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쉐네베르크 묘지에도 비슷하게 그런 무덤들이 모인 구역이 있다. 다만 이곳에는 나이대와는 상관없이
1939-45년 사이, 2차대전 중에 죽은 이들이 묻혀 있다는 게 다를 뿐이다.
물론 이름이 없는 무덤도 있다. 미처 이름을 갖지 못해서가 아니라,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묘지를 즐겨찾는 이들은 '일반적 관념과 달리 밝고 평온한 곳'이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사실 정말로 밝고 평온한 묘지라 해도, 그 안에서 가장 묘지다운 곳은 역시 응달진 부분이다.
새까맣게 뭉친 흙덩이의 습습한 냄새를 맡노라면 새삼 여기가 무슨 테마파크가 아니라 죽음의 장소임을 실감하는 것이다.  


3월 중순부터 베를린은 이미 봄날이 완연하다. 카페 테라스마다 사람들이 넘쳐나고,
쇼핑몰 앞에 설치된, 옛날영화 속 fairground 마냥 조잡하지만 사랑스런 어트랙션들마다 아이들이 가득하다.
이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2유로나 하는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말았다.

쇼핑몰 앞 아시아마켓에서 두부와, s&b카레와, 시금치 같은데 길이와 굵기가 대략 3-4배인 채소를 사왔다.
뿌리가 포항초마냥 먹음직스레 발그스름하길래 참기름 넣고 무쳤더니 시금치 맛 그대로다.

돌아오는 길에 '우표 및 동전' 전문점이 있길래 얼마만에 보는 거냐 하고 반가워 가까이 가봤더니
4월 6일까지만 연다고 적혀 있다. 이런.


:

waiting for the miracle

lyric 2010. 1. 11. 00:33



두 명의 유대인 거장 중 누가 더 좋냐고 묻는다면 딜런보다는 코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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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나는 기다려왔어
밤이고 낮이고 기다려왔지.
시계도 한 번 보지 않고서
반평생을 훌쩍 흘려보냈어
수많은 초대장을 받았고
그중 몇은 당신이 보낸 걸 알아.
하지만 나는 그저 기다리고 있어
기적이, 기적이 일어나기를.

당신이 정말로 날 사랑했단 걸 알아
하지만 이것 봐,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걸.
당신이 분명 상처받았으리란 걸 알아
당신의 그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겠지
내 방 창문 밑에 서서 기다리며
그토록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드려 대느라고
하지만 나는 위에서 그저 기다릴 뿐이지
기적이, 기적이 내게 오기를.

그래, 당신은 분명 싫을 거야
이곳에서 있기가 싫겠지.
오락거리라곤 하나도 없고
심판은 가혹하니까.
지휘자는 모차르트를 연주한다 말하지만
그 음악은 싸구려 팝송처럼 들릴 뿐이지
당신이 기적을,
기적만을 기다리며 있을 때에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로
난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없었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당신이 홀렸다는 걸 스스로 알 때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지
당신이 한 조각의 기적을 갈구할 때엔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어
기적이 당신에게 오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만 할 때에는.

당신 꿈을 꾸었어, 내 사랑.
바로 며칠 전 일이었지.
당신은 거의 발가벗은 채였지만
당신의 일부는 환한 빛이었지.
당신의 손가락과 엄지 사이로
시간의 모래가 흘러내리고 있었어
그렇게 당신은 기다리고 있었지
기적이, 기적이 일어나기를 말이야.

그래, 우리 결혼하자구.
우린 너무 오래 외로워했잖아
그러니 이제 둘이 함께 외로워하자.
우리가 그만큼 강한지 한번 보자구
그래, 뭔가 미친 짓을 하자
완전히 말도 안되는 짓을 해보자
기적이, 기적이 일어나기를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당신이 사로잡혔다는 걸 깨달았을 때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지
당신이 빵 한 조각을 구걸해야 할 때엔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어
기적이 당신에게 오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할 때에는.

당신이 고속도로에서 쓰러져
빗속에 누워 있을 때,
사람들은 당신에게 괜찮냐고 묻고
당신은 물론 별일 없다고 대답하겠지.
그들이 똑바로 말하라고 다그치면
그러면 시치미 떼고 이렇게 대꾸해야 해
당신은 그저 기다리는 중이었다고
기적이, 기적이 일어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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